김시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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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창간 19주년을 맞이한 투데이코리아는 건전한 사회와 독자들의 알 권리를 위해 우리 사회에 만연한 구조적 부조리와 고질적 문제를 심층 보도하며 진실을 추적해 왔다. 특히 사이비 종교, 권력형 비리, 성범죄 등 공동체를 위협하는 사안에 대해 집중 조명해왔다. 이번 시리즈는 한국 사회에서 장기간 방치되어 온 사이비 종교 ‘다락방(세계복음화전도협회)’의 실체를 추적하는 탐사보도다. 본지는 성폭력 피해자와 내부고발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류광수 총재 중심의 권위주의적 통치 구조, 은폐 체계, 재정 비리 등을 연속 보도하며, 신도 보호와 정의 구현을 위한 언론의 사명을 다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 이번 편에서는 다락방의 역사적 기원과 류광수의 초창기 행적, 이단 규정 및 조직 확장의 과정을 조명합니다.
동삼교회는 당시 해양대학교 앞에 자리한, 약 350여 명의 성도가 모이는 중형 교회였으나 내부 상황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교인들 사이엔 지역감정이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었고, 바닷일, 농업, 상업에 종사하는 지역 주민들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며 갈등은 점점 심해져 갔다.
결국 교회는 세 개의 파벌로 분열되었고, 김 전도사가 부임한 첫날부터 '담임목사 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예배에 울려 퍼졌다. 급기야 일부 교인이 강단을 점거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교회 내에서 폭력 사건까지 벌어졌다. 이후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고, 결국 김 전도사와 담임목사는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은 단순한 교회 내 갈등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후 김재헌의 행보는 한 사람의 사역이 아닌, ‘다락방 전도운동’이라는 새로운 흐름의 기원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시작점에, 우리가 알고 있는 ‘창시자’ 류광수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락방 기도모임의 시작, 그리고 류광수의 등장
1987년경에는 ‘경희어망’의 창고를 빌려 예배를 드릴 만큼 규모가 커졌고, 그 중심엔 여전히 전도사 신분이었던 김재헌이 있었다. 하지만 정식 목사 안수를 받지 않은 상태였기에 예배 인도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 시점에서 교회의 조직화를 추진하는 흐름이 형성됐다. A 장로가 교회에 합류하면서 담임목사 청빙위원회가 구성됐다. 세 명의 후보자 중 마지막으로 방문한 이가 바로 류광수였다.
류광수는 교인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담임목사로 확정됐다. 류광수의 부임이 확정되자 김 전도사는 사표를 제출했지만, 류광수는 “함께 사역하자”며 그와의 동행을 제안했다. 두 사람은 이후에도 함께 교회를 이끌었고, 예배 장소는 32평 규모의 지하 예배당으로 옮겨졌다.
시간이 흐르며 자연스럽게 중심축은 담임목사였던 류광수에게로 기울었고, 그의 리더십은 점차 확고해져 갔다. 그러던 중 갑작스러운 사고로 다락방은 새로운 국면에 들어서게 된다.
류광수의 음주뺑소니 사고, 그리고 침묵의 시작
김재헌 전도사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어느 날 밤, 류광수가 경찰서 유치장에 있다는 전화를 받고 큰 충격을 받았다”며 “곧장 경찰서로 달려갔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사고는 1988년 1월 18일 오후 8시 30분경, 부산 영도구 청학시장 인근 고갯마루길 입구에서 발생했다. 류광수는 ‘베스타’ 차량을 운전하다 횡단보도를 건너던 청년을 치고 그대로 현장을 이탈했다.
이를 목격한 택시 운전기사와 승객은 차량을 추격했고, 결국 영도 고갈산 포병부대 인근 골목에서 그를 붙잡았다. 놀라운 사실은, 당시 추격에 나섰던 택시 승객이 류광수가 담임목사로 사역 중이던 동삼제일교회 집사 C씨였다는 점이다.
김 전도사에 따르면 “사고 다음 날 C 집사님이 예배를 마친 뒤 담배 한 갑을 들고 와 ‘사고 직후 류광수가 주머니에서 급히 꺼내 던진 물건을 내가 주워왔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후 교회 내부로 사건이 퍼지는 것을 우려한 김 전도사는 C 집사에게 “절대 이 일을 외부에 알리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당시 교회는 성장과 분열의 기로에 서 있었고, 또다시 불신과 갈등이 재현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김 전도사는 특히 이 사건에서 류광수의 음주는 성찬식이 아닌, 부산노회 소속 동기 목회자들과의 술자리에서 이뤄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류광수가 이후 해명한 ‘성찬식에서 마신 포도주 때문’이라는 주장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내용이다.
김 전도사는 “성찬식에서 술을 마셨다는 이야기는 내가 꾸며낸 것”이라며 “당시 교회가 또 깨질까 두려운 마음에 그럴듯한 해명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밝혔다.
또 류광수는 오랜 기간 사고 당시 피해자가 거의 다치지 않았음에도 못된 마음으로 자신을 괴롭혀 2달 동안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고 주장했지만, 법원 판결문에 따르면 해당 사고 피해자는 턱뼈가 골절돼 병원으로부터 4주 진단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고로 류광수는 1년 동안 강단권이 중지되었다.
한국교회에 스며들기 시작한 다락방
조용히 몸집을 불려가던 이들은 1990년대 후반부터 한국 교회 안으로 본격적인 확장을 시도했지만, 주요 교단들이 이를 막아서고 다락방을 ‘이단’으로 규정하며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예장 통합)은 1999년 제84회 총회에서 다락방을 이단으로 결의했고, 예장 합동 역시 2000년 제85회 총회를 통해 같은 결정을 내렸다.
뒤이어 기독교대한감리회는 2002년, 기독교대한성결교회는 2003년 각각의 총회에서 다락방을 이단으로 공식 규정했다.
이후에도 다락방에 대한 이단 결의는 이어졌고, 대부분의 교단은 류광수의 교리와 조직 운영 방식에 이단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다락방 측은 이에 굴하지 않고, 이단 해제를 위한 전략적 접근을 시도했다. 일부 군소 교단 및 연합기관과의 동맹을 통해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이었다.
2011년 6월, 다락방은 대한예수교장로회 개혁(예장 개혁)과 통합하며 정통 교단과의 연결을 시도했다.
당시 다락방과의 통합은 예장 개혁 내부의 큰 반발을 불러왔고, 결국 교단은 분열에 이르렀다. 이는 다락방이 교단 안에서 정통성을 얻기 위해 감행한 노력이 가져온 대가였다.
정통 교회로의 편입 시도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2013년 1월 14일,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는 실행위원회를 통해 다락방의 이단 해제를 결의했다. 당시 한기총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의 보고서를 바탕으로 한 투표 결과, 실행위원 67명 중 44명이 찬성표를 던졌다.
하지만 이러한 결정도 즉각적인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예장 합동, 통합, 고신 등 기존에 다락방을 이단으로 규정한 교단들과 다수의 신학자들은 “한기총은 이단을 규정하거나 해제할 권한이 없는 연합기구일 뿐”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각 교단의 이단 결의를 무시한 채 이뤄진 해제 선언은 오히려 다락방의 이단성 논란을 더욱 부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다락방은 이후에도 꾸준히 교계 내 입지 회복을 위한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많은 교단과 신학자들은, 류광수와 그의 조직이 지닌 교리적·신학적 문제점들이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고 보고 있다.
[류광수 왕국의 몰락②] 드러난 균열, 침묵을 깬 사람들로 이어집니다.
